인터파크도서 북&

[칼럼 > 문학의 오늘] 1930년대 유머에 담긴 결혼의 표정 2화

아내가 남편더러 하는 말

대저 남자란 자기 말만 말이라 하고, 자기 하는 일만 옳은 줄 알것다. 자기가 좋아서 주색장이라면 파고들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곧 ‘투기한다’ 하지만, 그런가보다 하고 가만 있은즉 ‘얼싸 좋다’하고 일층 더 하는 것을 어찌해. 참 한심하여! 그중에 술을 먹으면 ‘먹자, 먹자’하다가 필경 집까지 뱃속으로 들어가고 잡기를 하면 등이 닳아서 의복까지 전당잡히고 바둑을 두기 시작하면 부모가 돌아가셔도 모르니 참 기가 막혀! 내가 당신같은 남편을 만난 것이 불행이지요. 좀 정신을 차리시오. 이 말 저 말 다해도 소용이 있소? 내가 당신 같은 남편을 만나기가 불행이지요. 고생살이를 하면서라도 벌어 먹일 터이니 나를 좀 소중하게 알아주오. (...) 자, 밥 한 번지어 보시오. 에그! 밥 짓는 사람이 그렇게 해서 되오? 장갑 낀 채 쌀 씻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이 밥 보아라. 절반은 죽이요, 절반은 생쌀이오. 밑에는 타버렸네. 장좀 가져오. 에그! 이것은 석유병이 아니오? 당신이 나를 석유를 먹여 죽이려하는구려! (...)

 

남편이 아내더러 하는 말

대저 여성이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라. 아무 까닭 없이 ‘헤헤’ 웃는 일이 많길래 ‘웃는 것이 우는 것보다 좋다’하면서 있었더니, 그 다음에는 갑자기 울지요. 옷감 사라 해서 옷감 사주면 양산 사내라 하고, 양산 사주면 신, 신 사주면 비녀, 시계, 은으로 된 것 사주면 금으로 된 것, 금으로 된 것 사주면 금강석을 사내라 하지요. 남편은 거지가 되어도 상관없고 자기는 귀족 생활을 하려 들겄다. 내 월급이라는 것은 꼭 작정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양복도 사 입어야 하지, 구두도 사 신어야 하지, 상관에게 선물도 해야하지. (...) 내가 대신이 되면 가만 있어도 자동차를 태워주고 연회에도 데리고 갈 터인데, 필경 그대가 호사하고 못하는 것은 나의 출세하고 못하고에 달려 있지 않나? 호사하고 싶으면 나의 출세를 기다릴 것이오. 자고로 출세한 영웅호걸 옆에는 조강지처가 있다는데, 저 여편네랑은 아무리 영웅호걸도 출세는 글렀을걸? 남편이 출세하려는 것도 사실은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서 아닌가. (...) 이렇게까지 아내의 일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알어줄 것 같으면 더운 눈물 한 방울쯤은 부득이 떨어질 것 같기도 한데. 그대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지만 나도 그대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 일생에 유감이지. 그만 단념하고 이혼하는 것도 애처로운 일이기로 가만히 참고 있는 터이니, 매우 주의해서 나를 좀 소중하게 알아주게. 계집 자식도 그대처럼 되지 않게 잘 길러주게. 그것 뿐이야.

 


선우일, <양천대소>(재판, 박문서관, 1917)표지

 

남편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내의 마음에 대해, 그녀의 ‘명품’에 대한 욕심에 대해, 그리고 피할 길 없는 바가지에 대해 투덜거린다. 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내 아내’ 옆에서라면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하겠다는 것이 그 논리. 반대로 아내는 남편의 고집스러움에 대해, 집까지 삼킬 듯한 주색잡기에 대해, 가족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무능력한 생활력에 대해 짜증 섞인 한숨을 감추지 않는다. 물론 두 재담은 확실히 남성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아내는 투덜거림에서 그 역할이 멈추는 반면, 남편은 자신의 순정을 아내가 알아준다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은 흘리지 않겠느냐, 알고 보면 자신은 멋진 남자라는 ‘마초적인’ 상상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남성이 창작했을 이 두 재담에 대해, 우리는 웃음의 영역까지 지배한 남성의 말하기를 지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결혼이란 이어져야할 것이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기에, 단순하고 씁쓸하지만 동시에 사실인, 불가능에 가깝지만 끊임없이 지향할 밖에 없는, 결론을 두 재담은 공히 품고 있었다. 바로 “나를 좀 소중히 알아주게.”라는 말이 그것이다. 재담이 단지 웃음만이 아닌 까닭은 삶에 대한 이 짧은 통찰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웃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거칠기 그지없고 지친 삶에 찌들어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안이 되는 웃음의 한 자락을, 재담은 보여준다. 물론 결혼이라는 주제는 재담 전체에서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김준형, 이홍우 선생님이 작성한 일련의 논고에서는 우리는 재담에 대한 적지 않은 이해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최근 정명기 선생님이 노고를 들여 편찬한 <한국재담자료집성>(보고사, 2009)은 식민지 시기에 간행된 여러 재담집을 현재에 되살려낸 소중한 성과이다. 이 책을 일독하다보면, 조선시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웃음의 코드가 근대를, 서구를, 정치를, 풍속을 경유하여 만들어낸 식민지 조선의 웃음을 입체적으로 재구할 수 있다. 여러 웃음을 일별하는 가운데 눈에 띈, 정치와 결혼을 경유한 재담 하나를 사족으로 붙인다.

 

생활이 곤란한 남자는 류큐로 가라

류큐 여자는 다 숙녀요, 열녀니까 그런 행복은 다시 없소. 여자가 베도 짜고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여, 죽기까지 일만하니 남자는 물론 긴 담뱃대나 물로 가만히 놀고 있으면 그만이요, 이렇게 좋은 곳이 다시 없으니 생활이 곤란한 열패자는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단념하고 류큐에 데릴 사위로 가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결혼할 때는 남자가 돈을 내여야 하는데 돈을 많이 내면 낼수록 여자가 일을 많이 한즉, 20원쯤 내면 남자는 한평생 놀고 먹을 것인데, 만약 50원을 내면 얼마나 끔찍하게 대해줄지는 알 수 없죠! 또 한 달에 세 번씩 남편에게 돈을 주어서 기생질도 시켜준다는데, 더욱 좋지 않소!

 

<앙천대소>(문명사, 1913)에 수록된 이 재담은 마치 아직도 한국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적힌 ‘어떤’ 현수막을 선연히 연상하게 한다. 다만 여기에는 지금처럼 어떤 나라에 가면 김태희가 밭은 매고 있다는 노골적이고 유치한, 판타지만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돈’에 따른 ‘차이’를 언표함으로써, 현실의 광고를 그대로 가져와 웃음으로 만들면서 그 현실을 다시 한 번 비튼다. 웃음은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며, 그 폭로는 다시 기존의 질서로 회수되거나 긴장 속에 놓인다. 웃음조차 없이 너무나 처절한 지금의 현수막을 여전히 앞에 두고, 이미 100년 전에 나온 이 재담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것인지 다시 한 번 의문이다.

 

- 글 : 장문석 (육군사관학교 교관)

인터파크도서 북&

[칼럼 > 문학의 오늘] 1930년대 유머에 담긴 결혼의 표정 1화

사랑하는 아들아! 네 편지는 받았다. 네게 혼인하라는 편지를 너의 어머니가 자꾸 쓰라고 한다. 지금도 옆에 지켜 앉았다. 너도 혼인하고 싶다하니 아무쪼록 속히 하도록 하여라.
이 애, 지금 너의 어머니가 어디 볼일 보러 갔다. 이 자식! 혼인하지 말아라. 독신생활이 제일이니라. 아비는 혼인 생활에 진저리난다.

 

<걸작소화집>(신문당, 1939)은 식민지 시기에 발간된 재담집이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의 한 절을 두고, 거기에 나타난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을 수 있는) 결혼에 대한 남성의 ‘분열증’ 앞에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페이지를 넘긴다.


: 나는 결혼을 두 번 했는데, 두 번 다 실패했네. 
: 어떻게 되었기에?
: 첫번 결혼은 색시가 도망을 갔네 그려 
: 둘째번은?
: 둘째번은 영 가지를 않네 그려.


‘우스개소리’, ‘재치로운 이야기’라는 뜻을 가지며, 때로는 소화(笑話), 골계담(滑稽譚)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재담은, 그동안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파적거리 등의 취급을 받으면서 문학사의 시야에서는 거의 잊혀졌다. 독서물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에서조차 재담의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현전하는 것 중 가장 이르게 공간(公刊)된 재담집 <요지경>(슈문서관, 1910)으로부터 기산할 경우, 스무 권이 넘는 재담집이 식민지 시기에 발간되었고 그 중 적지 않은 책들이 재판 이상을 거쳤다. <깔깔우슴>(조선도서, 1916)이 1926년 당시에 이미 8판을 거듭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재담집은 20세기 전반 내내 ‘팔린’ 스테디셀러였으며 식민지 대중문화와 독서문화의, 작지만 당당한 하나의 구성물이었다.

 

물론 재담의 전통은 위로 조선시대 이야기꾼의 청중을 압도한 우스운 이야기판이나 한문으로 기록된 ‘패설’로부터 연원할 것이며, 아래로는 해방 이후, 그리고 90년대의 ‘베스트셀러’ <YS는 못말려>(미래미디어, 1993) 시리즈에까지 이어진다. 공식적인 ‘책’의 역사에서는 소외되었으나 재담은 계속 소비되었고, 재담이 품고 있는 웃음의 대상은 계몽, 학교, 성, 음식, 유행, 외모, 신분, 정치, 욕망 등 삶의 전반을 망라한다. 이 짧은 글에서는 그 중 ‘결혼’이라는 문제에 집중해서 식민지 시기 재담의 한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물론 식민지 시대의 결혼에 대해서라면, 무수한 신문기사나 소설이 증언한 희비극의 기록이 적잖이 남아 있다. 또한 결혼을 놓고 동서고금의 철현(哲賢)들이 전한 아포리즘 또한 남아 있다. 그렇다면 결혼에 대한 수많은 발화 가운데, 재담의 자리는 어디일까. 신문이나 잡지, 법안이나 판결에서처럼 공식적이지도 근엄하지도 경직되지도 않으며, 또한 소설처럼 기술적이고 극적인 첨삭이 가해지지도 않은, 가장 투박하고 거칠고 동시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웃음’. 공적인 담론의 장과 때로는 겹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 담론 틈에 비껴있는 작은 공간에서 삶에 밀착한 웃음으로 결혼을 그려내는 것은 재담의 몫이었다. 그것은 지혜일 수도 있고 위안일 수도 있고, 단지 파열된 비웃음일 수도 있고, 퍼질러진 신세한탄일 수도 있었다. 재담이 보여주는 결혼에 대한 웃음은 그 여러 표정 사이에 존재하기도, 혹은 그 여럿 모두이기도 했다.


 
<요지경>(슈문서관, 1910)의 본문 오른쪽에 ‘총독부도서관’ 장서임을 나타내는 날인이 있다

 

알다시피 환웅웅녀 이래로 결혼은 이 땅에서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처첩제도가 있었다고 하나, 모든 양반이 그러한 것은 또 아니었다. 그 시대에도 능호관 이인상처럼 단 한 사람 아내에 대한 애틋함을 절제된 제문의 형식에 담아낸 맑은 마음으로부터, 난봉꾼 파락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의 결혼‘들’이 있었다. 다만 조선시대의 ‘웃긴 얘기’를 일별할 때, 우리는 이 시기 재담이 품고 있는 주제가 주로, 투기나 질투, 결혼이라는 제도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주로 남성의) 욕망, 혹은 권력을 이용해 음욕을 충족시키려는 시도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웃의 아내를 범하려다 망신을 당하는 남성, 처의 투기를 고치려다 오히려 고생만 하게 된 남편 등이 웃음의 주된 대상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물론 남성의 ‘바람’과 아내의 질투는 여전했다. 그러나 재담이 근대에 들어서 새롭게 포착한 것은 부부 ‘두 사람 사이’의 때로는 미묘하고, 울컥하며, 한숨만 나오는 관계 그 자체였다. 투기와 바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재담은 그보다는 부부가 각기 서로를 향한 ‘애’와 ‘증’의 감정덩어리 그 자체와 자신의 타들어가는 속내에 보다 집중했다. 부부라는 것 자체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재담이 그려내는 부부 ‘사이’의 일이 앞서 본 것 같은 분열증적인 울컥함으로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부로서 삶의 희노애락과 두 사람의 지친 인생, 그리고 기쁨과 회한이 모두 웃음의 아래에 놓여 있다. 여러 재담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아무리 오래 같이 살고 오래 얼굴을 봐도, 끝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때 문제는 이해할 수 없는 바로 그 존재와 함께 평생을 산다는 것이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또 내 눈 앞에 있을 바로 그 얼굴. <죠션팔도 익살과 재담>(덕흥서림, 1927)에 하나의 짝으로 나타나는 편지 형식의 두 재담은 서로에 대한 ‘이해불가’의 심정을 극대화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정념들을 길게 묘사한다.


웹상에 퍼져있는 자료들의 활용1

이 자료는 http://www.artbees.net/3d-web-page-display/ 에서 Psd형식으로 다운로드 받을수 있습니다.  이 자료에서 웹페이만을 교체해서 만든것입니다.
누구든지 쉽게 만드실수 있습니다.



1.
영화를 10분정도 축약하여 보여준다
. (아버지와 아들이 해변에 이르러 대화를 나누는 장면까지만...) 

2.
우리는 요즘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마음의 바다 저 깊은 한 구석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불편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끝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또한 그것은 현대문명이 얼마나 종잇장처럼 가볍고, 위태로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3.
바닷가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장면을 통해 이 영화는 관객 모두에게 인류 보편의 질문을 던집니다. 이 세상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질문은 종말과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다.

2009년 12월 영화<2012>가 개봉했을 때 <프레스노 비> 신문은 학계와 종교계 지도자들에게 사람들이 왜 종말 영화에 열광하는지 물었는데, 칼스테이트 대학의 사회학 교수 마가렛 곤솔린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지요.”

영화평론가 브렛 맥크랙킨은 사람들이 종말에 관한 영화를 보도록 “내몰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모든 인간에겐 정의감이 내재되어 있다. 종말과 같은 극적 상황에 처해서도 그 감각이 보존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노여움이 끔찍한 재앙으로 임할 때 역시 신은 살아 있다며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경기침체 때 관객은 현실의 침체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랄 뿐 아니라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한 후의 또 다른 세상, 이를테면 사후세계나 “세상의 저편”에 대한 것을 영화를 통해서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고 전도서 기자는 말합니다(전 3:11). 또한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궁금해 하도록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때가 되어 숨을 거두건, 종말을 맞이하건, 그 모든 상황을 통해 자신의 도덕성을 정확히 가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류 종말이라는 묵시적 주제를 다룬 위의 영화들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충족시켜줍니다.

이 세상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할리우드는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밝혀졌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천국이라고도 하고 천당이라고, 하늘이라고도 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4.
천국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들이 있다.
-여러 이단적인 사례소개

예수님이야말로 천국에 대해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이 하나님나라 즉 천국에 있다.
그렇다면
1)사람들은 천국에 적합하지 않다
2)인류의 자동적 종착지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3)예수님은 지옥을 피할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5.
정리

<참고자료>
영화_더 로드
월간지_크리스챠니티 투데이-(세상의 끝을 붇다)
책_천국과 지옥 그 센스&넌센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