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

1930년대 유머에 담긴 결혼의 표정 2화

pastor_kim 2012. 4. 11. 09:31

인터파크도서 북&

[칼럼 > 문학의 오늘] 1930년대 유머에 담긴 결혼의 표정 2화

아내가 남편더러 하는 말

대저 남자란 자기 말만 말이라 하고, 자기 하는 일만 옳은 줄 알것다. 자기가 좋아서 주색장이라면 파고들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곧 ‘투기한다’ 하지만, 그런가보다 하고 가만 있은즉 ‘얼싸 좋다’하고 일층 더 하는 것을 어찌해. 참 한심하여! 그중에 술을 먹으면 ‘먹자, 먹자’하다가 필경 집까지 뱃속으로 들어가고 잡기를 하면 등이 닳아서 의복까지 전당잡히고 바둑을 두기 시작하면 부모가 돌아가셔도 모르니 참 기가 막혀! 내가 당신같은 남편을 만난 것이 불행이지요. 좀 정신을 차리시오. 이 말 저 말 다해도 소용이 있소? 내가 당신 같은 남편을 만나기가 불행이지요. 고생살이를 하면서라도 벌어 먹일 터이니 나를 좀 소중하게 알아주오. (...) 자, 밥 한 번지어 보시오. 에그! 밥 짓는 사람이 그렇게 해서 되오? 장갑 낀 채 쌀 씻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이 밥 보아라. 절반은 죽이요, 절반은 생쌀이오. 밑에는 타버렸네. 장좀 가져오. 에그! 이것은 석유병이 아니오? 당신이 나를 석유를 먹여 죽이려하는구려! (...)

 

남편이 아내더러 하는 말

대저 여성이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라. 아무 까닭 없이 ‘헤헤’ 웃는 일이 많길래 ‘웃는 것이 우는 것보다 좋다’하면서 있었더니, 그 다음에는 갑자기 울지요. 옷감 사라 해서 옷감 사주면 양산 사내라 하고, 양산 사주면 신, 신 사주면 비녀, 시계, 은으로 된 것 사주면 금으로 된 것, 금으로 된 것 사주면 금강석을 사내라 하지요. 남편은 거지가 되어도 상관없고 자기는 귀족 생활을 하려 들겄다. 내 월급이라는 것은 꼭 작정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양복도 사 입어야 하지, 구두도 사 신어야 하지, 상관에게 선물도 해야하지. (...) 내가 대신이 되면 가만 있어도 자동차를 태워주고 연회에도 데리고 갈 터인데, 필경 그대가 호사하고 못하는 것은 나의 출세하고 못하고에 달려 있지 않나? 호사하고 싶으면 나의 출세를 기다릴 것이오. 자고로 출세한 영웅호걸 옆에는 조강지처가 있다는데, 저 여편네랑은 아무리 영웅호걸도 출세는 글렀을걸? 남편이 출세하려는 것도 사실은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서 아닌가. (...) 이렇게까지 아내의 일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알어줄 것 같으면 더운 눈물 한 방울쯤은 부득이 떨어질 것 같기도 한데. 그대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지만 나도 그대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 일생에 유감이지. 그만 단념하고 이혼하는 것도 애처로운 일이기로 가만히 참고 있는 터이니, 매우 주의해서 나를 좀 소중하게 알아주게. 계집 자식도 그대처럼 되지 않게 잘 길러주게. 그것 뿐이야.

 


선우일, <양천대소>(재판, 박문서관, 1917)표지

 

남편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내의 마음에 대해, 그녀의 ‘명품’에 대한 욕심에 대해, 그리고 피할 길 없는 바가지에 대해 투덜거린다. 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내 아내’ 옆에서라면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하겠다는 것이 그 논리. 반대로 아내는 남편의 고집스러움에 대해, 집까지 삼킬 듯한 주색잡기에 대해, 가족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무능력한 생활력에 대해 짜증 섞인 한숨을 감추지 않는다. 물론 두 재담은 확실히 남성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아내는 투덜거림에서 그 역할이 멈추는 반면, 남편은 자신의 순정을 아내가 알아준다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은 흘리지 않겠느냐, 알고 보면 자신은 멋진 남자라는 ‘마초적인’ 상상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남성이 창작했을 이 두 재담에 대해, 우리는 웃음의 영역까지 지배한 남성의 말하기를 지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결혼이란 이어져야할 것이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기에, 단순하고 씁쓸하지만 동시에 사실인, 불가능에 가깝지만 끊임없이 지향할 밖에 없는, 결론을 두 재담은 공히 품고 있었다. 바로 “나를 좀 소중히 알아주게.”라는 말이 그것이다. 재담이 단지 웃음만이 아닌 까닭은 삶에 대한 이 짧은 통찰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웃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거칠기 그지없고 지친 삶에 찌들어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안이 되는 웃음의 한 자락을, 재담은 보여준다. 물론 결혼이라는 주제는 재담 전체에서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김준형, 이홍우 선생님이 작성한 일련의 논고에서는 우리는 재담에 대한 적지 않은 이해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최근 정명기 선생님이 노고를 들여 편찬한 <한국재담자료집성>(보고사, 2009)은 식민지 시기에 간행된 여러 재담집을 현재에 되살려낸 소중한 성과이다. 이 책을 일독하다보면, 조선시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웃음의 코드가 근대를, 서구를, 정치를, 풍속을 경유하여 만들어낸 식민지 조선의 웃음을 입체적으로 재구할 수 있다. 여러 웃음을 일별하는 가운데 눈에 띈, 정치와 결혼을 경유한 재담 하나를 사족으로 붙인다.

 

생활이 곤란한 남자는 류큐로 가라

류큐 여자는 다 숙녀요, 열녀니까 그런 행복은 다시 없소. 여자가 베도 짜고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여, 죽기까지 일만하니 남자는 물론 긴 담뱃대나 물로 가만히 놀고 있으면 그만이요, 이렇게 좋은 곳이 다시 없으니 생활이 곤란한 열패자는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단념하고 류큐에 데릴 사위로 가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결혼할 때는 남자가 돈을 내여야 하는데 돈을 많이 내면 낼수록 여자가 일을 많이 한즉, 20원쯤 내면 남자는 한평생 놀고 먹을 것인데, 만약 50원을 내면 얼마나 끔찍하게 대해줄지는 알 수 없죠! 또 한 달에 세 번씩 남편에게 돈을 주어서 기생질도 시켜준다는데, 더욱 좋지 않소!

 

<앙천대소>(문명사, 1913)에 수록된 이 재담은 마치 아직도 한국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적힌 ‘어떤’ 현수막을 선연히 연상하게 한다. 다만 여기에는 지금처럼 어떤 나라에 가면 김태희가 밭은 매고 있다는 노골적이고 유치한, 판타지만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돈’에 따른 ‘차이’를 언표함으로써, 현실의 광고를 그대로 가져와 웃음으로 만들면서 그 현실을 다시 한 번 비튼다. 웃음은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며, 그 폭로는 다시 기존의 질서로 회수되거나 긴장 속에 놓인다. 웃음조차 없이 너무나 처절한 지금의 현수막을 여전히 앞에 두고, 이미 100년 전에 나온 이 재담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것인지 다시 한 번 의문이다.

 

- 글 : 장문석 (육군사관학교 교관)